JTBC

주요 메뉴 영역

본문 영역

차이나는 클라스
본 프로그램의 저작권은 JTBC에 있습니다.

23/6/18 종영 |  https://tv.jtbc.co.kr/jtbclecture

강연자 답변 보기

[228회 안정준 교수] 안정준 교수님께 질문 있습니다!

2022-02-11 PM 2:53:19 조회 3277

[임*환 시청자님의 질문]


Q. 교수님 강연 재밌게 잘 들었습니다.


평소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아 역사 관련 프로그램을 자주 시청하고 있는데 삼국시대 외교 관련 내용은 자주 다뤄지지 않아 생소했지만 새로운 내용을 배울 수 있어 좋았습니다.


특히 예전 대학생 시절 읽었던 고대사 관련 책 중에 백제가 중국 쪽에 많은 식민지역을 거느린 해상왕국이었다는 학자의 주장이 실린 책을 보고 그것이 사실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교수님 설명을 들으니 그것이 백제의 외교적 수완을 높이기 위한 술수였음을 알 수 있어 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백제가 신라를 이용해 자신들의 외교적 성과를 얻었다는 내용 신선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 질문이 있습니다.


삼국시대 가요 중에 "처용가"의 주인공인 처용이 아랍인이라고 들었었는데, 통일신라 당시 울산(?) 쪽의 항구에 아랍지역 국가들의 선박도 정박할 정도로 신라가 외교적 능력이 많이 성장한 것 같은데, 이때 당나라를 통하지 않고 아랍과 직접 교역이 가능했던 것인지, 그렇다면 당나라나 중국 쪽 국가들이 이를 그냥 묵인했던 것인지 궁금합니다. 분명 실크로드의 주도권을 장악한 중원의 국가들은 자신들을 통하지 않는 무역과 외교적 관계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제재를 가했을 것 같은데 통일신라는 어떻게 그런 먼 나라와 직접 교역이 가능했는지, 강연에서 설명해주셨던 외교적 무능력함을 고려하면 2~3세기만에 그 정도의 성장이 가능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앞으로도 풍부한 역사적 감각을 향유 하기 위해 꾸준히 역사 관련 강연을 듣고 생각하며 우리 역사의 위대함을 자녀들에게도 알려주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안정준 교수님 답변]


A. 중국의 경우 후한(後漢)말에서 위진남북조로 넘어가는 시기가 되면 중앙아시아로부터 온 상인들이 문헌에 등장합니다. 이들을 ‘호상(胡商)’ 혹은 ‘상호(商胡)’로 부르기도 했고요. 이후에도 많은 서역 상인들이 중국과의 교역을 위해 찾아왔다고 전합니다. 이들이 취급한 물품은 매우 다양했는데, 유리, 사향, 산호, 호박(琥珀), 루비, 옥, 항료 등을 가져오기도 했으며, 중국은 주로 비단을 수출해서 서아시아 각국과 로마에도 물건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6~9세기에 이르면 서투르키스탄 출신의 소그드인들이 활동하면서 동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비잔틴 제국을 연결하는 실크로드 무역을 장악하기도 했습니다. 당나라 초기에 장안에 거주하는 서역인의 수가 거의 1만여 호에 달했다고도 하며, 당 현종대의 치세를 몰락하게 한 반란군 수괴인 안록산도 본디 아버지가 소그드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755년 안록산의 반란 당시 수도 장안에는 40년 이상 거주하며 처자식을 두고 자기 집을 소유한 ‘호객(胡客)’의 수가 4,000여 명에 달했다고도 합니다. 이때의 ‘호객’은 바로 서역인을 가리키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많은 서역인들이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중국에 이르는 지역을 왕래하기도 하고, 그중 일부가 중국에 거주하게 되면서, 자연히 중국이라는 제국 너머에 있는 한반도 지역의 정보도 서역으로 알려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9세기 무렵부터 아랍권 문헌에 신라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아랍 지리학자인 이븐 후르다드비가 쓴 글에 “중국의 맨 끝 깐수라는 곳의 맞은편에 신라(al-Silla)가 있다”라는 대목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당연히 서역인이 한반도 지역으로 건너가는 경우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신라나 백제 역시 중국을 통해서, 때로는 그 지역에 온 상인들과의 접촉을 통해 화려하고 진귀한 서역 물품들을 수입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예컨대 신라의 왕비 무덤인 황남대총 북분에서는 감옥금팔찌가 출토되었는데, 넓고 길쭉한 금판에 터키석 등의 보석을 끼워 넣어 장식한 형태로서 이란 등지에서 주로 만들어지는 기법입니다. 또 계림로 14호 무덤에서는 화려한 장식의 보검이 발견됐는데, 표면에 맑고 검붉은 석류석과 유리질을 녹여 넣어 장식했으며 형태상 6세기에 이란 혹은 중앙아시아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경주 시내의 적석목곽분에서는 소위 ‘로만글라스’로 불리는 유리용기가 발견되기도 했고, 황남대총 남분에서는 봉수형(鳳首形) 유리병이 발견되었는데, 형태상 동부 지중해 연안의 제작기법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신라고분에는 서역산 금제품과 유리제품이 상당량 발굴되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또 구체적으로 누가 들여왔는지는 기록상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신라 설화의 주인공인 처용(處容)이 교역 등의 목적으로 신라에 찾아온 서역 출신 사람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을 것이며, 경주 용강동 고분에서 출토된 토용(土俑)의 얼굴 모양과 수염 모습이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인과 닮았다는 것 또한 한반도로 왕래한 서역인의 흔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신라?백제의 고분에서 출토된 여러 유물들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연구가 지속된다면, 당시 고대 지배층이 사용했던 외래 물품들의 유입 루트와 그것을 전래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


질문이 채택된 분께는 질문 시 기재된 연락처로 한 달 이내 상품이 발송될 예정입니다.


(배송 정보 오기재 및 받으시는 분의 부주의로 인해 반송된 경품은 재발송이 불가합니다.)

SHOPPING & LIFE

하단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