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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강 신병주 교수] 광해군의 중립외교와 장만에 대하여 /osman0119님의 질문

2018-11-28 PM 2:54:06 조회 455

아이디  osman0119님의 질문에 대한

강연자 신병주 교수님의 응답입니다.



【 질문 】 - ID osman0119님


교수님, 안녕하세요.

지난주 연산군 강의에 이어서, 어제 광해군 강의도 재미있게 잘 들었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광해군이 명,청 사이에 중립외교를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제가 들은 바로는 그 중심에 장만(張晩,1566~1629, 1624년 정충신과 이괄의 난 진압)이라는 문과 급제자 출신의 국방전문가가 있었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장만은, 명에 대해서는 사대(事大)를 계속하되 지원병을 보내주지 말고 후금(1636년 이후 청)에 대해서는 절대로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광해군에게 주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장만이 중요한 핵심 인물이라고 볼 수 있지 않는 지요 ?

감사합니다.



【 답변 】 - 신병주 교수님.


 장만(1566~1629) 장군은 선조에서 인조 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특히 국경 지역의 방어에 대한 문제가 국가의 최대 정점으로 떠오른 시기에 국방과 외교 부분에서 큰 역할을 했던 장군입니다. 이 시기 장만 장군은 함경도관찰사, 평안병사, 도체찰사 등 북방의 최고 책임자 임무를 맡으면서 북방의 정세를 세밀히 보고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웠음이 실록의 기록 등에서 확인이 됩니다.

 광해군 재위 15년간은 여진족이 세운 후금의 침입이 가시화되고 실제 후금과의 전투도 수행되던 시기로서, 이 시기에 광해군의 각별한 신임을 받아 국방 정책과 외교 정책의 수립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광해군이 장만 장군에 깊은 신임을 보였음은, 1619년 4월 2일 화친을 도모하자는 후금 누루하치의 서신이 오자, 장만에게 이 서신에 대해 어떻게 답해야 할지를 물어보았다거나, 누르하치의 서신에 회답하는 말 중에 “장만 차자(箚子)의 뜻을 아울러 첨입하여 지어서 들이라고 하였다.”는 기록, 8월 16일 서쪽 변경의 사태가 날이 갈수록 더욱 위급해지고 있으니 장만에게 속히 의주로 달려가서 한시바삐 계책을 세워 대처하도록 하였다는 기록 등에서 장만의 국방과 외교에서의 활약상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광해군, 인조 시기 국방과 외교의 중심에 있었던 역할에 비하여, 장만 장군의 이름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습니다. 장만 장군에 대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연구와 평가가 이루어져 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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