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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호 안재현 신부지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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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게, 맑게, 자신 있게.
고등학생 시절 은호가 지나가면 옆 학교 애들이 하나같이 소리쳤다. 야! 인간 포카리스웨트 지나간다! 그렇다. 일상으로 손실된 촉촉함을 존재만으로도 채워주는 남자. 도시에 살고 있음에도 도시의 혼탁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숲처럼 고요한 남자. 뒤를 비추는 후광이 너무 세서 마음속 티끌 한 점 보이지 않는 남자. 그래서 감히 가지려 할 수 없는 남자. 그게 바로 은호였다. 깨끗하고, 맑고, 자신 있는 것은 은호의 외모뿐만이 아니다. 심성 또한 그러했다. 이렇듯 인류의 공공재로서의 완벽한 자격을 갖춘 은호가 여자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주님을 만나고, 부모님의 뜻이 아니라 마리아님의 뜻을 따라 신부의 길을 가기로 선택한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그 신부(bride) 아니고 그 신부(priest).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하라는 결혼은 안 하고 제 인생을 신에게 바치겠다니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질 일이었다. 엄마의 눈물과 입원의 콜라보레이션은 번번이 은호의 신학교 입학 지원을 방해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결단코 입학하리라. 엄마 때문에 꿈을 놓치기에는 그 꿈이 너무 진지했다.
세계와는 유치원 동기로 지금껏 지겹게 붙어있다. 남들은 속도 모르고 탑배우랑 친구라고 하니 부럽다 연발이지만 그렇다고 속을 다 내보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 친구 세계가 사실은 아무 때고 아무 사람으로 변한다는 걸 그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남자로도 여자로도 변하는 세계를, 남자로도 여자로도 보지 않고 그저 사람 보듯 보는 은호. 어쩌면 아무리 탐내봐야 사람의 것이 아닌 신의 소유가 되기로 한 남자여서, 그렇기 때문에 세계의 비밀을 알게 되고 지키게 될 자격이 생겼는지도 몰랐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고요한 호수 위의 배처럼 천천히 흘러가던 은호의 삶에 풍랑이 인 건 한 여자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갑자기 나타난 사라는 가장 친한 친구인 세계를 곤경에 빠뜨리고, 자꾸만 세계의 비밀을 캐내려 들었다. 왜 그렇게까지 나쁘려 하는 걸까? 나쁜 게 뭐 기분 좋다고. 게다가 진짜 나쁘다고 하기에는 사라의 행동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의 흐름보다도 투명하고 쉽게 읽혔다. 그래서인가? 자꾸만 사라의 곁에 서면 찰랑이는 물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문득 웃음이 새어 나오고, 같이 있으면 자주 즐거웠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정말로 이런 사랑을 말하는 것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착각인가? 지금 신의 목소리보다 당신 목소리가 더 가깝게 들리는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