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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우연 신예은 28세, 캘리그라피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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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에 걸린 건 확실한데.. 너는 나한테 왕자님일까, 마녀일까?”
잘 다니던 직장 때려 치고 막연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자. 전문적으로 캘리그라피스트 공부한 지 1년 만에 공모전에 입상. 전업 캘리그라피스트가 되었다. 뭐 하나에 꽂히면 정신 못 차리는 타입이다. 꽂힐 이유 없으면, 이유를 만들면 되지? 취업도 안 되는 문예창작과를 전공할 때부터 답 나온 거다. 좋게 말하면 자기 주관 뚜렷하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 합리화의 달인. 자기 최면술사. 사람들은 멋지게 직장 때려 치고 하고 싶은 일하며 산다고 부러워한다. 어떤 사람들은 쿨하게 연애하고 헤어지는 우연을 멋지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다 우연의 속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우연의 삶은 2프로, 아니 20프로 쯤 부족하다. 말이 캘리그라피스트지 아직 제대로 된 공방도, 만족할 만한 수입도 없다. 공모전 입상 이후 이렇다 할 커리어가 없어 중학교에서 방과 후 강사로 일한다. 그마저도 방학이 되면 백수 신세라 카페 알바니 단기 알바니 놓을 수가 없다. 캘리그라피스트가 직업인지 부업인지 헷갈리는 혼란의 시기다.
그리고 연애. 연애에 있어서는 50프로 쯤 부족할지도 모른다. 스무 살부터 연애만 세도 열 손가락이 부족하다.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쿨하게 연애한다. 인스턴트 연애를 지향한다. 이게 다! 오래된 저주 때문이다. 누구도 좋아할 수 없는 저주. 딱 한 사람, 그 애. 이수만 빼고. 열여덟의 첫사랑. 10년의 짝사랑. 두 번의 고백, 두 번의 거절. 우연은 자신의 지옥 같은 10년이 몇 줄로 요약될 때면 분했고 슬펐고 아팠다. 자다가도 이불을 뻥 찰 만큼 부끄러웠다가, 술만 마시면 엉엉 울만큼 슬펐다가, 폭음에 쓰린 속만큼이나 마음도 아팠다. 죽을 것 같이 좋아했는데, 고백에 돌아오는 답은 친구로 지내자는 이기적인 말. 3년 전 두 번째 고백 후에는 더 이상 호구가 되지 않겠다며 두 번 다시 보지 말자고 돌아섰다. 쿨하게.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기에 저 하나 잊어보겠다고 공백도 없이 부지런하게 연애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놈을 깨끗이 지울 만큼 완벽한 백마 탄 왕자님이 다가왔다. 출판사 대표 온준수. 이 남자 사랑둥이에 직진남이다. 사람을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인 것 같다는 말에 자신을 두고 테스트를 해보란다. 환한 자신감을 뿜으며 우연의 테스트용 남자가 되어주겠단다. 이러한 찰나에 짝사랑 그놈이 돌아왔다. 함께 일할 파트너로. 아직도 자신을 좋아하냐고 도발하는 그놈을 보며 다짐했다. 보여줄게. 내가 너를 완전히 잊었다는 걸. 절대, 두 번 다시 너 같은 놈을 사랑하는 일은 없을 거다. 절대.
그때는 몰랐다. 절대라는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